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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라!

2014.04.11 22:23

관리자 조회 수:8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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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다 이일에 증인이라

2014 부활절 4월 20일 .... 주님 기대하시는 부활 의미 되 새겨야

 

 

부활절은 기독교의 중요 절기의 하나로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지 3일 째 되는 날, 그가 다시 죽음을 이기고 살아난 것을 기념하는 날이다. 부활절은 3세기경에 유럽이나 중동의 다신교 전통과 상징물들의 접목으로 시작되었다. 이것은 다신교 문화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오늘 날의 상황화를 시도한 복음전도를 위한 접촉점 찾기의 일환이었다. 즉 다신교 의식이나 문화에 기독교의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오랜 세월 그런 과정을 거처 오며 오늘날의 부활절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부활절은 매년 그 날짜가 달라진다. 빠를 경우는 3월 넷째 일요일, 늦을 경우는 4월 넷째 일요일에 올 수도 있다. 이처럼 날자가 일정하지 않은 것은 음력으로 계산하여 지켜지기 때문이다. 초기 교회는 유월절을 기준으로 부활절을 지켜오다가 기원 후 4세기에 들어서면서 날짜에 관한 의견충돌이 발생했다. 결국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파스칼보름'(Paschal full moon: 기원 325년 당시 춘분이었던 3월 21일 이후 첫 보름) 다음에 오는 일요일로 부활절을 정하면서 논쟁이 정리되었다. 파스칼보름이 일요일인 경우에는 그 다음 주 일요일이 부활절이다. 오늘날에도 이 방법으로 날짜가 계산된다. 따라서 올 해의 부활 주일은 4월 20일이다.

 

그러면 주님은 부활절을 대하는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실까?

무엇이건 의미 있는 사건을 기념하는 데 있어서 어떤 행사를 치르는 것 자체는 문제될 게 아니다. 부활절도 예외가 아니다. 예수님도 골고다 십자가의 죽음을 눈앞에 두고 제자들과 함께 성만찬을 거행하시며 그것을 기념하라고 하셨다. 또한 행사를 치르는 형식은 나라마다 교회마다 문화적으로 오는 다름도 있기에 그걸 사사건건 시비할 일은 아니다. 그러나 밖으로 나타나는 형식의 드러냄 자체가 목적이 되어 기념의 진정한 의미를 잃어버린다면 그것이 아무리 세상을 떠들썩하게 할 만한 이벤트가 된다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기독교의 핵심이 되는 역사적 사건으로 부활신앙이 아니라면 교회 출석의 길고 짧음에 관계없이 그것은 인간이 지닌 종교성 그 이상이 아니다. 성도는 다시 사신 주님을 바라보며 자신의 부활을 소망하는 가운데 이 땅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한다. 우리에게 부활소망이 없다면 세상에서 더욱 불쌍한 자라고.

 

그러나 우리는 지금 부활신앙의 현저한 퇴색을 경험하는 시대를 살아간다. 시대사상과 함께 생명공학의 발전이 오히려 부활의 가능성을 부정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역으로 보면 그것은 오히려 생명의 신비와 더 나아가 하나님의 능력과 예수그리스도의 신성을 증거하는 반증이기도 하다.

 

예수그리스도의 부활은 성경의 예언이 성취된 역사적 결과이지 결코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니다. 성경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목격한 수많은 증인들이 증거가 있으며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다메섹 도상에서의 바울의 회심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예수부활을 입증하는 사건이다. 누구보다도 앞장서서 기독교 신앙을 핍박하던 그가 가장 위대하고 헌신적은 복음 전도자로 변화된 기원이 바로 부활하신 주님과의 실제적인 만남이었던 것이다. 예수부활은 결코 환상이 아니다. 그리고 바울의 급진적인 변화는 예수부활의 역사성을 드러내는 실제적 증거이다.

 

그러면 특별히 2014년 부활절을 맞이하며 우리가 받아야 할 교훈은 무엇인가?

 

부활은 죽음을 전제한다. 먼저 죽고 나서야 부활은 소망으로 다가온다. 우리가 알듯이 기독교 진리는 역설의 진리다. 죽어야 살고 낮아져야 높아진다. 이것은 부활의 의미가 가지고 있는 핵심이다. 그렇다면 내가 먼저 죽는 삶, 그 삶이 주님의 부활을 믿는 신앙인의 증인된 삶이며 그 삶이 이 땅을 살아야 할 믿는 모든 자의 존재 이유이다. 지식전달이 아닌 변화된 삶의 모습이 필요하다. 새로운 생명이 우리 속에 들어온 결과로 인한 변화된 삶, 그것이 부활 생명만이 가질 수 있는 능력이며 신비이다.

 

지난 한 해를 돌아보면 유난히도 큼직큼직한 사건들이 발생했다. WCC 한국대회로 인한 갈등으로부터 교계의 불협, 몇몇 대형교회의 각종 비리사건에 이르기까지 총체적으로 힘든 시간들을 보냈다. 해가 바뀌었지만 올해 들어서도 여전히 나아진 것이 없다. 어두운 터널의 끝이 보이지 않는 온갖 부패상이 온갖 매체에 활자화 되고 이제 세상이 교회를 조롱하며 질타하고 훈계한다.

 

우리가 너무 오랜 세월 믿음만을 강조한 탓인지도 모른다. 개혁시대의 상황과 맞물린 현실적 측면의 강조였을 뿐인 그 믿음을 말이다. 행함을 강조한 야고보도 바울이 만난 예수의 제자가 아닌가! 구원에 관한한 믿음에 더 할 것이 없다. 그러나 믿음은 행함이 따라야 함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친 것이 아니다. 그것이 성경의 일관성 있는 가르침이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개혁의 바람이 필요한 때다. 관념적인 사색적 교리 논쟁이 아니라 삶의 개혁이다. 앵무새 같은 말만 되풀이 하는 신학자가 변해야 하고, 자신의 삶은 여전히 변화할 줄 모르고 강단을 휘어잡는 목회자가 변해야 하고, 이들을 비방하며 안티만 양산하는 일단의 지식층 성도들이 변해야 한다.

 

부활생명은 변화의 기본적 근원이다. 그리고 부활을 소망하는 신앙인의 변화된 삶의 특성은 이미 언급한 대로 자기를 죽이는 삶이다. 그러나 우리는 너무나 많은 세월 남에게 보이고 자랑하기에 바빴다. 자기사랑과 자기 우상화의 결과다. 남보다 더 커야 하고 더 많아야 하고 더 유명해져야 했다. 내 안에 있는 자아가 죽지 못한 까닭이다. 나는 날마다 죽노라는 바울의 선언을 그렇게도 자주 인용했건만 잎만 무성하다. 방향성과 목적성의 문제이다.

 

성경은 목표지점의 빗나감을 죄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가짜 회심의 현저한 특징이다. 교회는 성전이란 이름으로 거대한 건물 짓기에 매달렸고 이제는 대중의 시대적 사상에 편승한 가치관의 혼돈 속에 갈 방향을 잃고 무겁게 주저 앉아있다. 복음의 순수성과 교회의 역동성을 잃은 까닭이다. 회복이 필요하고 총체적인 개혁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모두가 외적인 드러냄의 기념비적 행사보다는 그 속에 담아야 할 부활생명의 참된 의미를 다시 한 번 깊이 새겨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내가 죽어야 산다는 원리 아래 저마다의 처해진 각자의 위치에서 부활의 참된 증인의 삶을 살아가자.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일에 증인이로다”(행 2: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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